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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추억하며] "아버지, 이제는 다 이해가 됩니다"

저는 아버지가 왜 그렇게 산에 자주 가셨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78세 노인이 홀로 LA카운티에서 가장 높은 볼디산을 등반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동안 700번이 넘도록 볼디산에 오르셨고, 1000번을 목표로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정상에서 늘 태극기와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한반도 깃발을 들고 계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께 그런다고 남북통일에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며 산에 그만 오르시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의 시골에서 자라셨습니다. 존함은 김자 석자 두자 입니다. 서울대학교에 진학하신 후, 서울에서 은행원으로 일하셨고 연세대학교 MBA 과정과 영국 맨체스터에서 공부하셨습니다. 네 명의 자녀 중 저는 막내입니다. 1981년, 아버지는 LA지사로 전근하셨고 3년 후, 아버지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에서 살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 자녀 교육을 위해 미국이 더 낫겠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주유소 겸 편의점을 매입하셨고, 일주일 내내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어머니와 함께 일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 곳에서 주말마다 일을 했습니다. 제 유일한 휴식 시간은 어머니와 함께 일요일 교회에 가는 시간이었고, 그 시간에도 아버지는 홀로 가게를 지키셨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가게에서 일하시며 수 많은 강도 사건과 1992년 LA폭동도 경험하셨습니다. 제가 의대에 재학할 때, 아버지께서는 저의 첫 차를 사주셨습니다. 수동식 창문이 있는, 가장 저렴한 차량들 중 하나였는데 더 좋은 차를 사 주지 않은 것이 서운했습니다. 2010년, 아버지는 자녀들을 모두 데리고 한국으로 여행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당신 할아버지의 독립운동에 대해 쓴 백일장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던 독립기념관을 방문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독립운동에서 활약하신 가문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연세가 들어가시면서 아버지께서는 등산에 더욱 몰입하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왜 그렇게 산을 사랑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형과 함께 아버지를 찾기 위해 볼디산의 정상에 오르며 저는 문득 아버지가 어떤 느낌이었을 지 알 것 같았습니다. 제가 볼디산에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볼디산에 오르시면 평화로운 느낌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기억 납니다. 어머니한테는 하느님이 자신을 포옹해주는 느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상은 오직 완전한 침묵과 평화만 있었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저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왜 거의 매일 산에 오르셨는지 이해했습니다. 아버지는 등산을 통해 자유로우셨던 것입니다. 40대 후반부터 60대 중반까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날마다 편의점 계산대 앞에 틀어박혀 계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산에 가실 때마다 고향 생각도 하셨을 겁니다. 아버지는 당신의 할아버지가 조선의 독립을 갈구했던 것처럼 아버지도 한반도의 통일을 염원하셨고 등산으로 그 의지를 보이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정상에서 사람들과 대화도 나누고 한국의 통일에 대해 이야기 하셨습니다. 등산은 연로하신 아버지가 통일을 지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자 행복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힘들게 한 걸음 한 걸음 산을 오르고, 위험한 산을 내려오면서, 마침내 저는 깨달았습니다. 아버지께서 평생 최선을 다하며 살아오셨다는 것을. 그 순간,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아버지께서 제 미래의 아내를 만날 수 있었다면, 제 미래의 아이들을 안아줄 수 있었다면 정말 기뻤을 것입니다. 그런 시간이 올 줄만 알았습니다. 제가 가장 후회하는 것은 "아버지 감사하고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저 한 번만 더 안아드리고 싶습니다. 따뜻한 포옹으로 말입니다. (※고 김석두씨 장례식은 22일(토) 오전 10시 세인트 그레고리 성당에서 열리고 오후 1시 만리장성에서 추모모임이 있다.)

2017-04-19

"이제 마운틴 볼디는 아버지의 집입니다"

산을 사랑한 아버지를 아들은 산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11일 마운틴 볼디서 숨진 채 발견된 고 김석두(79)씨의 장남 김동영(49) 박사(위장내과의)는 "아버지는 매일 산에 가셨고, 항상 산에 계셨다"며 "산처럼 바르고 큰 분"이라고 기억했다. 김씨는 지난 7일 마운틴 볼디로 홀로 등반을 떠났다가 실종됐고, 끝내 하산하지 못했다. 고령이지만 마운틴 볼디를 거의 800차례 가까이 오른 베테랑 산악인이었다.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던 가족과 지인들은 시신 발견 소식에 가슴이 무너졌다. 김 박사는 "아버지는 산 중턱의 캐빈에서 주무시기도 하셨기 때문에 그날도 하룻밤 묵으시나 보다 했다"며 "그런데 다음날 밤까지도 연락이 없어 9일 새벽에 산으로 찾아나섰다"고 말했다. 캐빈에 아버지의 부재를 확인하고 실종 신고를 했다. 대대적인 수색작업이 시작됐다. 김 박사는 "구조대장이 '이렇게 많은 수색대가 조직된 전례가 없다'고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면서 "다들 자기 가족처럼 아버지의 생존을 기원하면서 산을 뒤졌다. 고맙고 따뜻했다"고 말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에도 아버지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김 박사는 "발견된 곳은 평소 가시던 등반로 반대편이었다"면서 "높은 곳엔 아직 눈이 있어 미끄럽다. 아마도 실족하신 듯하다"고 말했다. 사망 소식이 전해지고 많은 사람들이 위로했다. 그중 일부는 안타까운 마음에 '왜 그렇게까지 무리해서 산에 가셔야 했나. 좀 말리지 그랬느냐'고 했다. 하지만 아들의 생각은 달랐다. 김 박사는 "같이 등반한 어느 날 아버지께서 '내가 부자가 아니어서 돈은 줄 수 없지만, 정신적인 유산만은 남기고 싶다'고 하셨다"면서 "볼디 등반 1000회를 목표로 산을 오르고 또 오르신 이유가 당신의 의지와 도전을 물려주시려 했던 것 아니었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버지를 이해하는 만큼 아들은 더 죄송하다고 했다. 16일은 아버지의 팔순 생신이다. 잔치 대신 아들은 장례를 준비하고 있다. "어제(12일) 처와 아이들을 데리고 산에 주차된 아버지 차를 가지러 갔습니다. 볼디로 들어서는데, 아버지가 느껴졌어요. 이해하기 어렵지만,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이제 볼디는 제게 '아버지의 산'입니다." 그 산에 자주 자식들과 오를 계획이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산이 아니라 아버지가 계신 산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구현 기자 chung.koohyun@koreadaily.com

2017-04-13

실종 김석두씨 추정 시신 발견…11일 오후 마운틴 볼디 북쪽서

지난 7일 마운틴 볼디에서 실종된 한인 산악인 김석두(78)씨로 보이는 시신이 발견됐다. 샌버나디노카운티셰리프국은 11일 보도자료를 통해 "오후 2시10분쯤 마운틴 볼디 북쪽 지역에서 구조헬기가 숨진 남성을 발견했다"면서 "정확한 신원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수색팀은 숨진 남성이 김씨라고 믿고 있다"고 밝혔다. 조난된 상황이나 정확한 사인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셰리프국은 이날 새벽부터 구조용 헬기와 40여 명으로 구성된 구조대를 투입해 대대적인 수색을 벌였다. 특히 지상 수색은 구조대를 4개팀으로 나눠 3개 팀은 산 정상에서 내려오고, 한 팀은 산 아래에서 올라가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김씨는 지난 7일 마운틴 볼디로 홀로 등반을 나선 뒤 연락이 두절됐다. 셰리프국은 이틀이 지난 9일 오전 8시쯤 가족들로부터 실종신고를 접수하고 수색작업을 벌였다. 이날 수색대는 산맨커스 플래트 캠핑장 인근에 주차된 김씨의 차는 발견했지만 이틀간 김씨의 생사는 확인하지 못했다. 김씨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1만64피트(3069m)의 마운틴 볼디를 거의 800여 차례 등반해 LA타임스 등 주요 언론을 통해 소개된 전문 산악인이다. 산악인들 사이에서는 '마운틴 볼디의 샘(김씨의 영어명)'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지난해 4000피트 높이 봉우리에 100일 연속 오르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2008년부터 4년에 걸친 백두대간 종주 기록을 책으로 엮어 2014년 출판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은행원으로 근무하던 김씨는 1981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왔다. 정구현 기자 chung.koohyun@koreadaily.com

2017-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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